쾌감의 스펙트럼

    학기 말이 다가오면서 긴장이 풀어지는 탓인지 소진되고 지치는 느낌으로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그러면서 ‘상담자의 자기관리’라는 명제가 함께 떠오른다. 패턴처럼 반복되는 일상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담자부터, 나도 모르게 긴장되게 하는 힘든 과거를 쏟아놓는 내담자, 아무리 상담을 한다고 해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변화를 일으키기 어려울 것만 같아 보이는 내담자까지... 우리가 만나는 내담자들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많은 이야기들을, 다양한 삶들을 꺼내 보여준다. 그들을 만남에 무조건적 존중과 공감적 이해로 다가가며 어떻게든지 수용하고 안아주려는 태도로 애쓰는 동안 우리의 심리적 자원은 고갈되기쉽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을 드러내 날카로운 마찰음을 일으키고, 크고 작은 생채기가 아프게 할 때쯤 아차 싶을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상담자의 자기관리와 자기돌봄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인데, 얼마 전 듣게 된 중독과 관련한 강의에서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이 있었다.

   중독자가 경험하는 매우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쾌감(보상)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빠져 즐겁다 혹은 좋다라는 느낌을 가질 때, 이러한 긍정적이고도 주관적인 경험과 느낌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쾌감(pleasure)이라는 보상(reward)이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더 강한 쾌감을 얻기 위하여 무언가에 대한 탐닉의 정도가 심해지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장애나 사회, 도덕적 기준에 따른 중단 압력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이것을 중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면서 강의자는 쾌감에는 스펙트럼이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한 개인이 쾌감을 경험할 수 있는 행동-예를 들어, 뜨개질, 독서, 소일거리, 산책, 밭일, 노동, 운동, 도전, 성취, 익스트림 스포츠, 게임, 도박, 술, 섹스, 약물까지. 이것들이 스펙트럼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중독자들은 앞서 열거한 행동 중에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스펙트럼의 왼쪽 끝에서부터 하나씩 즐거움을 경험하다 점점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즐거움(만족감)을 느끼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어떤 것’이 없어 어려움을 겪다가 그것이 행위든 물질이든 강력한 쾌감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에 깊이 빠져 중독으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쾌감을 경험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과다한 도파민으로 뇌에 변성이 와 내성과 금단현상이 생기기에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중독 현상을 이 한가지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쾌감의 스펙트럼’은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야 하겠구나, 다르게 말하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 다양하게 있어 그때그때마다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행동 등...아주 소소하지만 내게 작은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나를 살아나게 하고, 그야말로 ‘즐거움’을 주고 더 나아가 행복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싶다. 큰돈을 들여, 오래도록 계획을 세워 무언가 거창한 것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일상에서 경험하는 작은 행복을 찾아 매일매일을, 시간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감탄의 언어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을까.

    단풍이 지기 전, 가을의 한복판이라 느껴지는 어느 날 오랜만에 공원 산책을 하며 걷다 보니 약간의 축축하게 가라앉은 공기도, 물들어 가는 앞산도, 발에 밟히는 낙엽의 느낌도, 젖은 나무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도 너무 좋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지금 이런 느낌을 가지고 걷고 있다는 것이 잠깐이지만 행복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고, 편안하고, 재미있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 이번 방학에는 적어도 그런 즐거움 한, 두 가지씩은 찾아내 ‘자기돌봄’의 힐링 목록을 키워보면 어떨까.